공감의 반경 - 장대익
p.12 그러나 현시점에서가 아니라 인류의 진화사 전체를 펼쳐놓으면 우리의 공감력은 새롭게 보인다. 인류는 공감이 미치는 범위를 점진적으로 확장해왔다. 인류는 자원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이며 타자에 대한 증오를 증폭시키기도 했지만 이성적인 판단으로 공감의 범위를 넓히면서 외집단과의 공존과 평화를 구축해왔다. 공감의 범위는 확장 가능하며 이때의 공감은 단지 타인의 감정을 내 것처럼 느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타인도 나와 같은 사람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과학 기술이 문명의 물질적 조건이라면 이런 공감력은 가히 문명의 정신적 조건이라 할만하다. 타자/외집단까지 포용하는 공감이 없었다면 집단적 성취인 문명은 축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다른 영장류들이 갖지 못한 이런 탁월한 공감력은 호모 사피엔스의 핵심 징표 중 하나다. 중요한 것은 공감 자체가 아니다. '어떤' 공감을 '어디까지' 적용하느냐다.
p.19 우리는 외국인, 이주민, 성소수자, 장애인, 동물의 고통에도 내집단에게 하듯이 함께 느낌으로써 공감하는가? 자신 있게 그렇다고 말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집단이 아닌 존재에 대한 공감은 무언가 다르다. 느낌을 넘어서서 그의 입장을 내 것처럼 이해하려는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공감에 대한 정의가 단일하지 않음을 뜻한다.
p.25 공감 능력과 거울 뉴런계의 관계에 대해 더 살펴보자. 신경심리학자 조너선 콜Jonathan Cole은 신체적으로 타인의 표정을 따라 하지 못하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감정을 잘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혔다.
p.35 2장, 부족 본능,
우리 아닌 그들은 인간도 아니야
p.37 그런데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이보다 더 강력한 정서적 공감 네트워크가 있다. 바로 흡연! 회의장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도 쉬는 시간에 흡연 구역에서 만나면 그렇게 친근할 수가 없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 회의장에서 으르렁거렸어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담뱃불을 서로 붙여주며 다정해진다. 맞담배의 연기와 함께 연대감이 급상승하는 순간이다.
p.42 옥시토신이 내집단에 대한 선호도를 증진하지만 외집단에 대한 폄훼 또한 증진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p.48 독일의 문호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간다"라고 썼다. 이 문장은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바래지 않은 것 같다.
p.65 또 다른 흥미로운 연구도 있다. 참여자를 두 집단으로 나누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표시하도록 했는데 한 집단 앞에는 손 세정제를 갖다 놓았고 다른 쪽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았다. 실험 겨과 손 세정제를 갖다 놓은 곳의 피험자들은 정치적 성향이 좀 더 보수적이었다. 손 세정제는 그 공간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위생이나 청결의 개념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잠재된 보수성을 끌어올린 것이다.
p.72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Harari는 한 기고문에서 바이러스에게는 없지만 인류에게 있는 것은 집단 학습 능력이며 우리는 지식의 공유를 통해 팬데믹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p.89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누군가가 바로 옆에서 당신의 정치 성향에 따라 현 정권을 비판하거나 옹호하는 자료들을 매일 브리핑해준다고 해보자. 모닝 커피를 마시며 며칠은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 당신 귀에 대고 날마다 "지구는 실제로 평평해. 코로나19는 빌 게이츠가 백신 장사로 떼돈을 벌기 위해 만들어낸 거야"라고 속삭이는 사람이 있다면 어떠하겠는가? 아마 처음에는 솔깃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일이 계속된다면 곧 그를 멀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왠지 통제받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테니까 말이다.
p.96 이 추천 알고리듬들의 공통점은 한마디로 데이터를 통해 사용자의 성향을 분석하여 선호를 예측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추천 시스템들은 사실상 사용자의 과거 행동과 성향을 '넘어서는' 추천은 절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p.108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기존 추천 알고리듬은 인간의 동조 심리를 활성화하여 자기 자신에게 동조하거나 자신과 성향이 유사한 이들에게 동조하게 하여 플랫폼의 이득을 극대화하도록 설계된 시스템이다. 즉 그것은 사용자를 플랫폼에 더 오래 머물러 있게끔 하는 데 그 궁극적 목표가 있을 뿐 사용자의 성장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p.151 심지어는 과학자의 의견을 묻는 이례적인 일도 했다.
진화생물학자 최재천은 헌법재판소에 부계 혈통주의의 정당성과 그에 따른 호주 제도의 존폐에 관한 과학자의 의견서를 제출했다. 의견서에서 최재천은 자연계 어디에도 수정과 발생에서 수컷이 주도권을 쥔 생물이 없으며 오히려 생물학적인 족보는 부계보다는 모계 혈통으로 쓰여진다고 말했다. 이와 더불어 최재천은 40~50대의 남성의 사망률이 유독 높은 한국에서 호주 제도 폐지로 남성과 여성이 더 평등해지면 아무런 득도 없는 가부장이라는 멍에를 짊어진 남성들이 생물학적 이득을 볼 것이라고 강조했다.
p.172 한 연구에서는 동물의 정신 능력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갖고 있느냐가 그 동물에 대한 공감력에 영향을 준다는 결과가 나왔다.
p.173 원숭이, 너구리, 꿩, 황소개구리가 오용당하는 모습을 볼 때 피부 전도 반응Skin Sonductance Response, SCR의 값이 제일 높은 동물은 무엇일까? 방금 열거한 순서대로였다.
p.180 따라서 그들의 움직임의 의도를 파악하는 게 우리로서는 매우 중요하다. 즉 수렵 채집기와 농경 시기를 거치며 진화한 우리의 뇌에는 '움직이는 모든 건 의도를 가지고 있음'이라는 명제가 박혀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명제를 기억하지 못했던 사람들의 후예는 아니다. 그들은 사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멀뚱멀뚱 보다가 잡아 먹혔을 테니까.
p.200 2010년 보스턴의 한 병원이 소속 의사들에게 환자들의 표정과 음성 변화에 더 주목하고 눈 맞춤을 더 자주하게끔 훈련을 시켰다. 흥미롭게도 대략 서너 시간 동안의 훈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훈련 이후의 공감 수준은 그 이전에 비해 상당히 높아졌다.
p.200 아이들도 공감을 배울 수 있고 타고난 공감력을 더 크게 키울 수 있다. 캐나다의 교육혁신가 매리 고든Mary Gordon이 창안한 '공감의 뿌리roots of empathy'는 경험과 교육을 통해 어린이의 공감력을 향상시킬 수 있음을 증명한 교육 프로그램이다.
p.204 음악을 듣기 위해 노동할 필요는 없다. 음악은 그냥 들린다. 그렇다면 책은? 인류가 언제부터 문자를 발명하고 책을 만들기 시작했는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온다. 문자는 대략 8000년 전쯤에야 발명되었고 6000년 전쯤에야 수메르인들이 점토에 글을 새기며 전수하기 시작했으니 250만 년 전에 시작된 호모 종의 관점에서 독서는 아주 최신의 발명이다. 우리의 뇌는 책을 읽게끔 진화한 적이 없다. 독서가 힘든 노동인 것은 이 때문이다.
독서는 뇌에 큰 부담을 준다. 텍스트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전수해주려면 뇌에 꽤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럼에도 책 없는 사회가 없을 정도로 독서가 인류의 보편적인 행위로 발전한 이유는 그 비용보다 이득이 더 컸기 때문이다.
p.206 정보를 검색하며 한 번에 여러 일을 동시에 하는 멀티 태스킹은 디지털 시대의 습관이 되었고 그로 인해 우리는 너무 산만해졌다. 쏟아지는 정보의 폭포를 맞아 검색력은 화려해졌으나 사고력은 오히려 감소했다.
p.208 그렇다면 독서가 우리의 정서적, 인지적 공감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수많은 연구가 있지만 결론은 하나다. 독서는 공감력을 향상시킨다. 예컨데 어떤 연구에서는 참가자들에게 소설책을 주고 9일에 걸쳐서 매일 책의 1/9씩을 읽게 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마다 그들의 뇌를 관찰했다. 그 결과 책을 읽는 9일 동안 좌각회/연상회라고 부르는 부분과 내측 전전두피질 간의 연결이 강해졌다. 좌각회/연상회는 글의 이해 및 공감과 같은 사회적 정서 반응 및 기억력을 관장하는 부위다. 이 부위의 연결이 강해졌다는 것은 글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타인의 생각, 감정, 지식 등을 타인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능력이 향상 되었다는 뜻이다. 인지적 공감이 향상된 적이다. 더욱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한동안 체성감각피질과 후두엽에서의 연결 강도가 강하게 유지되는 것이 관찰되었다. 이는 마치 주인공과 같은 행동을 한 것처럼 그 활동 상황이 실제 뇌 속에서 일어났음을 의미한다. 그런 연결이 독서가 끝난 후에도 지속된다는 사실은 결국 독서가 뇌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p.210 과연 어떤 문화적 토양이 인간의 인지적 공감 능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될까? 이에 대한 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바로 다양성이 높은 사회다.
p.214 문화적 엄격함의 차이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에 의하면 역사적으로 생태적 위협에 빈번하게 노출되었던 집단일수록 사회적 규범에 대한 민감도가 높다. 여기서 생태적 위협에는 전쟁, 자연 재해, 전염병, 높은 인구 밀도 등이 포함된다.
p.218 비키니를 입은 뚱뚱한 몸매를 보지 못한 사회는 그만큼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회다. 나와 다름을 많이 접해야 타인을 인정하고 타인의 입장에 서볼 수 있는데 비키니를 입는 사람이 정해져 있다면 나와 타인이 독립적인 존재임을 어떻게 경험으로 알겠는가.
p.232 하지만 허태균에 따르면 집단주의의 핵심 가치는 어떤 조직에 들어갔을 때 그곳에서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일에 만족하고 조직을 위해 개인의 목적을 희생할 수 있는 태도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 그런 성향을 강하게 갖고 있지 않다. 한국 사람은 일대일의 개인적 관계를 가장 중요시하는 관계주의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집단주의와 달리 관계주의는 조직과 인간의 위계 맥락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즉 대인 관계적 맥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관계주의 사회에서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정체감이 규정된다. 그래서 누구와 있느냐에 따라 자신의 정체성이 바뀌는 맥락성과 역동성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