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 한강 / 리뷰, 줄거리, 결말, 해석. 이 책을 이해하기 힘든 사람들을 위하여
한국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있는 폭력이 당연한 사람은 이 책을 이해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난 누굴 저격하는게 기쁜 사람도 아니고 싸우는데서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도 아닌데......
해석에 관련된 글을 찾아보다 아래 글을 읽고 이 리뷰를 쓴다.
출처: https://theseoulite.org/?p=2522
사람이 이렇게까지 글을 못 읽어도 되나?ㅠㅠ 싶을정도로 편협하기 짝이없는 리뷰다. 심지어 글도 못 쓴다.
마치 롤리타를 보고 주인공 험버트에게 이입하여 '오 불쌍한 험버트..' 라고 느끼는 페도필리아처럼, 여성의 몸에 관한 표현을 할 때는 아주 기가 막혔다. 라고 표현한다. 정신이 아찔해진다. 작가의 의도를 못 읽다 못해 폭력적이고 불쾌하게 짜인 등장인물에게 이입을 해버린다. ㅋㅋㅋㅋㅋㅋㅋ 하..
여성에 대한 혐오가 만연하고 남성이 폭력성과 잔인함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자연’스러운 이 소설은 우리의 시대를 그대로 닮아 있다. 옛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책으로 꼽히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시절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이 별 다를 바 없어서가 아닐까.
터무니 없는 옛날의 얼토당토 안 되는 잘못된 의견을 말하고 있으면 그것이 얼마나 잘못됐는지 알아보기 쉬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채식주의자가 출판된 이후로도, 한국은 그렇게까지 발전하지 못했다. 17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책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 혹은 그 보다도 조금 더 가부장적인 시대상을 섬세하게 그리고 예민하게 표현한다. 그러니 특유의 예민함으로 글을 읽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시절에는 이 글을 해석하기 더 어려웠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도 이 책에서 이상함을 발견하지 못 한다면, 그것은 본인이 이 소설에 나온 남자인물들과 별 다를바가 없어서이기 때문이다.
아마 어느 사람들은 몇 몇 부분이 기이하다고 느낄 것이다. 예를 들면 채식, 예를 들면 노브라.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다른 부분을 기이하다고 느낄 것이다. 예를 들면 개고기를 먹는 모습, 예를 들면 아버지가 뺨을 내리 치는 모습
이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그 누구도 갑자기 시작된 영혜의 채식 행위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영혜는 누군가 그 이유에 대해 물어보면 '꿈에서..' 라는 말과 함께 알아듣기 어려운 표현을 한다. 하지만 영혜는 표현하지 못할 뿐, 채식주의자' 행위의 기원에 대한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건 개고기를 먹었던 어린시절의 죄책감에서 온다. 동시에 개를 향한 아버지의 폭력성. 잔인하게 죽임을 당한 피를 질질 흘리던 개의 눈.
그리고 그런 잔인한 가부장적 폭력성에 맞써 싸우려 했으나 결국 참고 버티는 것이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길이었다는 걸 알게 된 두 여성의 이야기이다. 한명은 끝까지 맞써 싸웠고, 한 명은 끝까지 참고 버티었다.
동생의 채식주의 선언과 더불어 시작된 기행은 자신이 겪은 폭력성에 반대하는 시위였으며
은혜의 삶의 형식은
도망치려고 생각도 해본적 없던. 삶을 포기한 피해자의 발자국이다.
이 부분에 대한 단서는 은혜의 어릴 적 이야기에서 나온다.
p.191 오래전 그녀는 영혜와 함께 산에서 길을 잃은 적이 있었다. 그때 아홉살이었던 영혜는 말했다. 우리, 그냥 돌아가지 말자. 그녀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금방 어두워질 텐데. 어서 길을 찾아야지.
시간이 훌쩍 흐른 뒤에야 그녀는 그때의 영혜를 이해했다. 아버지의 손찌검은 유독 영혜를 향한 것이었다. 영호야 맞은 만큼 동네 아이들을 패주고 다니는 녀석이었으니 괴로움이 덜 했을 것이고, 그녀 자신은 지친 어머니 대신 술국을 끓여주는 맏딸이었으니 아버지도 알게모르게 그녀에게만큼은 조심스러워했다. 온순하나 고지식해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던 영혜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고, 다만 그 모든 것을 뼛속까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안다. 그때 맏딸로서 실천했던 자신의 성실함은 조숙함이 아니라 비겁함이었다는 것을.
다만 생존의 한 방식이었을 뿐임을.
막을 수는 없었을까. 영혜의 뼛속에 아무도 짐작 못할 것들이 스며드는 것을. 해질녘이면 대문간에 혼자 나가 서 있던 영혜의 어린 뒷모습을. 결국 산 반대편 길로 내려가 집이 있는 소읍으로 나가는 경운기를 얻어타고 그들은 저물녘의 낯선 길을 달렸다. 그녀는 안도했지만 영혜는 기뻐하지 않았다. 아무 말 없이, 저녁빛에 불타는 미루나무들을 보고 있었을 뿐이다.
은혜는 무력하다. 무력하나 이 세상에서 죽지않고 살아가기 위해 세상과 타협한 사람이다. 죽지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사람이나, 그 역시도 단 한번도 소리지르거나 발길질 한 적 없이 자신이 마주했던 폭력성과 잔인함에 그저 고개를 돌렸을 뿐인 평범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래서 더더욱 영혜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다. 자신이 마주했던 그 폭력성과 잔인함이 영혜를 향한 것이었고, 본인은 알면서도 그걸 무시해왔기 때문에.
p. 197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 없다는 느낌이 드는 것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전의 어린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선량한 인간임을 믿었으며, 그 믿음대로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았다. 성실했고, 나름대로 성공했으며, 언제까지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후락한 가건물과 웃자란 풀들 앞에서 그녀는 단 한번도 살아본 적 없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그때 그 시절을 생각해 보자. 여성이 노브라를 한 상태로 마음껏 거리를 걸어 다니는 걸 상상할 수 있는가?
지금을 생각해 보자. 개를 질질끌며 죽이고 그 개를 잡아 먹던 행위를 지금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가?
그렇다면 여성에 대한 폭력은? 부부간의 강제적으로 이루어진 협의 없는 성행위는? 아침마다 밥을 차려 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잘 가려진 셔츠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은? 육아를 모조리 맡기는 것은? 화가 났다고 고함을 지르는 것은?
마지막 장면 중 정신병원에서 의사들과 간호사를 밀치고 허둥거리던 동생을 구하러 온 언니의 모습은 아마
모두가 다 미쳐 있다고. 당신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당신은 여기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하며 억지로 손과 발을 묶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동생을 구했을 것이다. 단순히 동생이 불쌍해서가 아니라, 가부장적 사회에서 가부장에 반대하는 의견을 냈을때 모든 이가 미친 사람이라고 취급 했던 것처럼. 언니는 무의식적으로 그 모습에서 자신을 보아 동생의 손을 들어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생을 병원에서 끌고 나온 것이다.
p. 190 아무도 날 이해 못해...... 의사도, 간호사도, 다 똑같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약만 주고, 주사를 찌르는 거지.
책의 제목이 '채식주의자' 인 것은 그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영혜는 단 한번도 자신이 채식주의자라고 명시한 적이 없다. 다만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채식주의자' 라고 판단하고, 소개하고, 멋대로 라벨을 붙인것이다.
이래도 이 책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다. 이해하지 않기로 선택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