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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집을 찾기 위해 집을 떠난다 - 장민지

내가 이 연구를 진행하면서 굳이 계급 이야기를 제외하고 젠더에 집중한 것은 이러한 연구 '시점'과도 맞물려 있다. 이전까지 계급은 젠더와 경합하면서 '생산의 사회적 관계'에서 논의의 우위를 점해왔다. 젠더는 늘 부차적인 면에서 설명되었고, 그것은 계끕과 젠더를 나누지 않고 뭉뚱그려 설명하거나, 암묵적인 위계를 설정하는 형태로 또 다른 침묵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예컨대 세대를 설명하는 다양한 용어들, 가령 'N포 세대', '디지털 네이티브', 'MZ 세대' 등은 전부 젠더를 수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연구는 과감하게 계급적 설명을 지우고 젠더적 측면만을 다루는 데서 시작한다. 이는 여성을 억압하는 가부장제적 이데올로기가 경제적 토대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고 있음을 부각하기 위해서다.

p.10 이후 나는 친구와 함께 연희동에 위치한 오피스텔에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친구와 그곳에서 5년 가까이 살았다. 고시텔 수준의 작은 방에 한 층마다 공용 화장실 하나, 공용 거실 겸 주방 하나가 전부인 곳이었지만, 그 집은 내게 최초의 '서울 집'이 되었다. 평생 살 곳이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나름 편안했고, 친구와의 생활은 심리적 안정감을 주었다. 이 안정감은 집의 장소감과 유사했다. 완벽한 주거 환경은 아니었을지라도 내게 돌아올 곳이 있고, 같이 밥을 먹을 사람이 있다는 건 굉장한 안정감을 제공하는 요소였다.

p.11 그렇지만 이주를 경험한 주변 친구들은 대부분 외로움을 토로하며 힘들어해 나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단련해야 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같은 위치의 사람들(여성청년 이주민)을 만나 혼자 사는 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운 일인지 이야기하곤 했다. 밤늦게 학교 앞을 지나던 친구 한 명이 성폭행을 당해 결국 학교를 그만두었다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회자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또 다른 이야기 소재는 이주를 경험한 여성청년들의 우울증과 자살에 관련된 것이었다. 실제로 서울에 올라와 혼자 살던 친구가 원룸 옥상에서 스스로 떨어져 죽은 사건은 우리에게 큰 트라우마가 되었다.

p.26 한국전쟁 이후 군사 정권의 주도 아래 한국 사회가 겪은 압축적인 산업화는 노동 집약적인 경공업을 중심으로 기반을 다졌다. 젊은이들은 고향을 떠나 공장이 밀집된 도시로 향했고, 물론 여성노동자들의 이주 또한 크게 증가했다. 1970년대에 비혼 여성청년들의 이주는 도시에서 홀로 지내는 여성들의 섹슈얼리티를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김춘수(2005)는 이주를 겪은 여성청년들에게 집이 더 이상 '보호'와 '사회적 재생산'의 기능을 하지 못하는 공간으로 경험된다고 지적한다. 집을 떠나온 여성청년들에 대한 사회적 담론은 그들이 결혼하지 않음을 문제 삼으며, 그들에게 일탈적이고 성적인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이를 구체와한다. 요컨대 사회는 가출, 문란한 성생활, 동거 등에 대한 담론을 통해 여성청년을 보호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으로 묘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p.33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공통적으로 젊을수록, 학력이 높을수록, 또 비혼자들이 기혼자들에 비해 높은 이동 성향을 보인다.


p.40 그렇다면 공간과 장소에 대한 학문적 접근은 어떨까. 놀랍게도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와 학문적 용어는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지리학에서 사용되는 공간이라는 용어는 그 용법에 따라 새로운 의미를 담아낼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학문 분야에 걸쳐 자주 쓰였다. 기본적으로 공간이란 비어 있고, 사이에 무엇이 들어설 수 있는 여지나 여백을 의미한다. 공간에는 절대적 공간, 상대적 공간이 있다. 물리적 공간이 있는가 하면 추상적 공간이 있다.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이 있고, 물리적인 실체가 없다고 여겨지는 사이버 공간도 존재한다. 반면 장소는 어떤 공간에 주체가 자신의 경험과 기억으로 감각을 채워나가는 것에 가깝다. 공간이 객관적 영역에 가깝다면 장소는 주체의 감각이나 가치가 부여된 주관적 영역이라 할 수 있다.

p.50 인간의 다양한 권리 가운데 이동의 권리는 남성 편향적이었다. 이는 남성은 공적 공간을 이동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여성은 정착 및 거주가 이루어지는 집(사적 공간)에 속박되어 사노동을 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이분법적-가부장적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p.57 이동인
각주. 하름 데 블레이Harm de Blij의 용어. 블레이는 이동인들이 위험 감수자들로서,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기회를 잡기 위해 기꺼이 친숙한 곳을 떠나는 이민자들이라고 설명한다(De Blij, 1988).

p.64 오늘날에는 개인 공간을 소유한다는 것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아이들이 자기 방을 갖고 그곳에서 자란 역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70년대 이후, 특히 80년대 중반부터 90년대 급격한 경제 성장을 거친 한국에서 가족 형태가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옮겨 감에 따라 도시 주택에 사는 아이들은 자기만의 방을 갖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혼자만의 공간에 익숙하지 않았던 가족 구성원들, 특히 아이들은 자기 공간을 갖게 됨으로써 부분적인 독립을 경험하게 됐고, 이를 통해 독립을 욕망할 수 있는 주체로 자라났다.

p.66 사적 공간에 대한 보편적 상상 중에는 사적 공간 내에서의 개인적 행위가 타인에게 공개되지 않으리라는 무의식적 믿음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사적 공간은 '비밀을 품을 권리'(Perrot, 2009/2013,141)가 있는 여러 형태 중 하나다. 

p.76 나중에 삼촌 타를 집으로 가는 길에 막, 언덕까지 빼곡하게 집이 차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아 진짜 사람이 많겠다, 부산도 도시긴 하고 우리 동네도 산동네까지 집이 있긴 한데, 저렇게 집이 많은데 내 집은 없다 이런 생각도 했고.

p.88 인터뷰 참여자들은 아주 초반의 낯선 감정에 대해 자기 정체성을 잃은 것처럼 행동하기도 하고, 이를 고향에서 되찾기도 하며 가족들과의 유대감을 재확인하면서 거주의 관습적인 감정을 찾아내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감각의 회복은 새로운 거주의 감각과 비교되며 아주 초반의 결핍을 메워나간다. 이상화된 거주 감각은 고향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행위의 반복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회귀 행위가 반복될수록 회복하고자 하는 거주 감각은 점차 사라지고 '행위'의 관행만 남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회귀 행위는 어느 순간 하나의 '의례ritual'로 변화한다.

p.140 얘가 빠지면 집을 이사해야 되는 그런 심정이 되는 거지. 이 집에서는 못 산다. 이제는. 기억이 많이 남아 있으니까. 나 혼자만의 공간이 아니니까.

p.184 "성격은 좀 옛날에는 되게 여리고 감수성도 예민했다고 그랬잖아. 근데 그런 건 이제 좀 있긴 있는데 많이 사라진 것 같아. 강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 이제."

p.189 혜령: 음... 제일 큰 거는 그거인 것 같아. 내가... 음... 이게 내가... 혼자 살고... 외롭고 하는 이 시기를 너무 많이 오래... 이제 겪었지. 나를 스쳐 지나가는 경험이 아니라, 나한테 이게 모조리 축적되고 있는 거라는 걸 알았을 때. 어. 그때 심적인 충격이 상당히 크가. 컸었지. 지금도 있고.
- 그 충격은 어떻게 해서 알게 된 거야?
그건 뭐 예기치 못한 순간에 온다고 본다. 예를 들면 그니까 이런 거지. 기본적으로 감정이 기복이 심해진다든지. 근데 그게 남한테 말을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 때문에 남들한테는 그걸 어필을 못 하지. 근데 나 혼자 있을 때 감정 기복이 심해짐을 내가 느끼는 거지. 예를 들면 분명히 나한테 어려운 일이거나 슬픈 일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내가 이유 없이 그냥 그게 너무 슬프게 느껴진다든지. 그걸 자꾸 나와 비교한다든지. 내가 나랑 그거를 이입시켜서 생각한다든지. 그리고 자꾸 나를 자학하게 된다든지. 자그마한 고민인데 계속 그거를 낭떠러지 끝까지 밀어붙여서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다든지. 내가 원하지 않는 습관과 행동을 계속하고 있을 때. '내가 왜 이렇게 하지? 왜 이거를 내가 싫고 미워하면서도 왜 이거를 놓지 못하고 계속 이렇게 살까. 내가 왜 이렇게 살고 있지? 왜?' 이런 생각을 내가 내 가슴 깊이 해봤을 때 어느 순간 드는 생각이 이게 내가 너무, 내가 너무 어떠한 방향으로 살아온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든 거지. 어떠한 그런 흐름으로. 근데 그게 되게 이제 뭐 혼자서 어떤 표류하는 그런 느낌으로서의 어떤, 그니까 뭐, 떠다니는 배 같은. 그런 느낌으로 너무 오래 살았기 때문에, 내가 이제... 난 그런 얘기를 하거든. 친구 만나면. 왜냐면 나처럼 너는 그렇게 집 옮겨 다니고, 맨날, 심지어는 일하는 것도 나는 돌아다니면서 하는 일을 해야되니까. 나는 24시간 365일이 항상 내가 내 두 발이 없으면 생활이 안되는 일을 하는 거지. 계속 돌아다니고, 계속 사람 만나고, 계속 얘기하고. 근데 세 가지가 모두 엄청 진이 빠지는 일이란 말이지. 근데 이거를 내가 세상에 사는 것도 부족해서 내가 직업까지 이런걸 가지게 되고, 내가 24시간을 이렇게 살고 있을 때. 그냥 드는 생각이 사람들이 "너 그렇게 살면 안 피곤해? 그렇게 살면 안 외로워?"라고 얘기했을 때 나는 정말 자조적인 말로 그런 말을 해. 가만히 있는 거는 이제 재미가 없다고. 나는 항상 떠다녀서 그냥 이게 나한테는 가만히 있는 거랑 같은 거라고. 오히려 나는 가만히 있으면 그게 가라앉아버릴 것 같아서 두렵다고. 그런 불안함이 어느 순간 그냥 나를, 내가 불안함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지. 그런 불안한 감정이 나를 가지고 있는 거지. 내가 그 안에 속해있다는 생각이 드는게 있었어. 

p.198 이처럼 미디어에서 재현되는 사회적 담론과 다양한 형태의 위협 - 잉여인간으로서의 삶, 특히 도채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건강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등 - 은 그들에게 자신을 대상화하여 살펴보고, 진단하고, 통제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자기 통치self-government'의 기제가 된다. 이러한 자기 통치의 작동 방식은 개인이 자신의 자아실현을 위해 자율적으로 선택하고 주체적으로 행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개인의 이지와 열정을 강조하며 구조적 불안정성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김수정, 2010,19).

p.200 미셸 푸고는 자신이 언제든지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각 개인으로 하여금 자기 감시와 자기 규율을 행하게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감시와 처벌>에서 "무기도, 신체도, 물질적 구속도 필요 없다. 단지 시선뿐이다. 각 개인은 검열의 시선이 지닌 무게에 짓눌려 자기 자신이 자신을 감독한다는 것을 내면화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감시한다"(Foucault, 1977, 155;Valentine,2001/2014,46 재인용)고 서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