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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이, 지니 - 정유정

사실 정유정씨.. 애매함.

 

재밌게 읽은 책도 있고 아닌 책도 있음

그리고 이번 책 표지와 제목이 그냥 뭔지 모르겠어서(책을 고르는 기준이 이렇게 단순할수가) 안읽었엇는데

독서모임에서 이번달 책이라서.  . 읽음

솔직히 초반부까진 별로였음(그냥 내가 원숭이 및 침팬치 및 고릴라 및 .... 영장류를 굉장히 싫어함. 이유도없음. 이렇게 단순할수가)

그냥 엠비티아이 두번째자리가 극단적 N일때 상상할 수 있는 답에 대해 엄청나게 풀어 쓴거같음(예: 내가 바퀴벌레가 되면 어떻게할래?)

 

하지만......

중후반쯤부터 과거-현재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면서 이야기가 1000000퍼센트 완전해지는순간. 좋아졌음

또 정유정 특유의 유머도 좋았고 그동안 무슨 이야기를 할지 고민했던 흔적이 보여서 좋았음.(단순히 '재미' 를 넘어서 무언가를 전달하고 싶다는 욕망이 보여서)

 

결론: 나름대로 재밌게 읽음. 그리고 나 이외의 독서모임 사람들은 다 너무너무 재밌게 읽었다더라.. ㅋㅋㅋㅋㅋㅋ

내가 유난히 까탈스러운 것도 있고

그냥 코드가 나와 맞는 그런 소설 부류들이 있는듯......

 

 

 

P.41 "나는 네놈 젖소가 아니다.”

그러니 당신 젖꼭지에 주둥이를 더 들이대지 말라고 했다. '쎄빠지게' 빨아봐야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거라 했다. 독립 자금 같은 건 기대 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대신 독립을 기념하여 당신의 배낭을 주겠노라 했다.

보지 않아도 알 만한 배낭이었다.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아버지의 손에 들려 나타나는 핼리혜성 같은 배낭이었다. 전라도 촌 동네 소작농의 아들이었다는 아버지가, 할아버지에게 받은 독립자금 만육천 원을 들고 서울로 상경하던 스무 살 시절에 장만한 배낭이었다. 자수성가를 증명하는 기념비적 물건이기도 했다. 그날 내가 배낭에서 얻은 건, 감동이 아니라 자식을 쫓아내는 게 집안 내력이라는 사실이었다.

"앞으로도 30년은 족히 쓸 수 있을 거다."

나는 30년 수명이 보장된 배낭을 잠자코 받았다. 하고 싶은 말이야 많았다. 예고도, 유예기간도 없이 이럴 수 있는지.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한겨울에 아들을 무일푼으로 쫓아내면 당신 인생이 좀 나아지는지. 이런 일을 하고도, 먼 훗날 당신 제사를 나한테 지내라고 할 것인지.

 

P.45 결혼식장에서 그간 잊고 살았던 대학 동기들을 만났다. 그중 한 놈은 고양이가 혀로 핥기만 해도 흠집이 난다는 예민한 시계를 내게 보여주었다. 삼천만 원짜리라 했다. 대학 시절 '만인의 딜도'라고 불리던 놈이 었는데 타고난 재능을 활용해 결혼으로 인생을 바꾼 모양이었다.

4년 내내 학점이 오승환 방어율이었던 다른 놈은 그냥 '아무 데나' 취직했다고 말했다. '아무 데나'가 어디냐고 묻자, '아버지 회사'라는 답이 돌아왔다.

 

P.81 다시 눈을 감았으나 잠은 빚쟁이처럼 도망쳐버렸다.

 

P.211 이 역시 그녀의 경우와 완벽하게 맞지 않았다. 빙의된 영혼이 그녀 자신이라는 점에서 그랬다. 빙의 역시 유체이탈만큼이나 자료가 많았다. 그중 어떤 문서는 빙의를 정신병이라 정의했다. 글쓴이가 제시한 치료법은 치악산에 기거하신다는 '화엄법사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의학적 진단에서 종교적 해법으로 도약한 셈이었다.

 

P.292 지니가 혼자라는 사실을 잊어 버리게 해야 했다. 외로움의 무게에 눌려 스스로 죽는 일이 없도록.

 

P.293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며, 살아 있는 동안 전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살아 있는 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P.308 동시에 품에 안긴 아기의 얼굴이 내 정면으로 돌아왔다. 나는 숨을 멈추고 바라봤다. 검고 가느다란 머리털과 쪼글쪼글하게 주름진 살긋빛 얼굴을, 젖꼭지를 찾아 어미의 가슴을 비비는 작고 귀여운 입술을, 갓 삶이 시작된 존재를, 그 눈부시고 연약한 모습을.

 

P.351 부교를 나와 계단을 오르고 마당을 통과해 별채까지 오는 길이 허망해서 울고 싶을 만큼 짧았다. 내 인생처럼.

 

P.372 민주는 서른이 되도록 취직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내쫓겨 노숙자로 전락한 신세이지만 '세상을 소리로 읽는 재능'을 지니고 있다. "벌이 자외선을 감지하듯, 살무사가 적외선을 보듯, 나방이 야밤에 색깔을 구별하듯" 이 세상 모든 소리의 미세한 차이를 감별해내는 민주의 재능은 이 작품의 중요한 테마 중 하나인 '우리가 잃어버린 공감 능력'과 연관된다. 너무 많은 미디어의 자극, 너무 다채로운 상품의 자극 속에 감각이 마비되어가는 현대인은 타자의 아픔에 쉽게 공감하지 못하고, 그 모든 타인의 안타까운 신음을 재난영화 속의 스펙터클을 감상하듯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게 된다. 다채로운 소리들 속에서 남들이 '무의미한 소음'밖에 감지해내지 못할 때, 그 복잡한 소리의 어우러짐 속에 서 뜻밖의 소통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민주의 재능은 빛을 발한다. 경청과 존중의 가치가 위협받는 이 사회에서 민주가 지닌 이런 모차르트의 귀'는 소중한 소통의 희망이 된다.